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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바티아 메스키타 『감정, 관계, 문화』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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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보편적일까? – 바티아 메스키타 『감정, 관계, 문화』

우리는 감정을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라 생각한다. 화가 나면 얼굴이 붉어지고, 기쁘면 웃음이 나고, 슬프면 눈물이 흐른다. 이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보편적인 경험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감정이 정말 그렇게 '보편적'일까?

바티아 메스키타(Batja Mesquita)는 이 질문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그녀는 감정이 단순한 생물학적 반응이 아니라, 우리가 속한 문화와 관계의 틀 속에서 학습되고 표현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감정, 관계, 문화(원제: Between Us)』는 바로 이 감정의 ‘문화적 구성물’로서의 성격을 섬세하고도 강렬하게 파헤친다. 감정을 ‘우리 사이(Between Us)’의 문제로 보는 이 책은 우리가 감정을 바라보는 방식을 송두리째 흔든다.


감정은 ‘내’ 안에 있지 않다, ‘우리’ 사이에 있다

대부분의 서구 심리학에서는 감정을 뇌와 몸의 반응으로, 즉 개인의 내면적 경험으로 규정한다. 기쁨, 분노, 공포 같은 감정은 뇌 속에서 일어나며, 이 반응은 보편적이고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메스키타는 감정이 관계 속에서 발생하고 작동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예컨대, 어떤 문화권에서는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자기주장을 나타내는 건강한 방식일 수 있지만, 다른 문화권에서는 이를 관계를 해치는 위협적인 행동으로 간주할 수 있다. 즉, 감정은 문화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기대되며, 조절된다.

메스키타는 이 현상을 ‘문화적 감정 규범(emotion norms)’이라고 설명한다. 감정의 발생, 표현, 조절 방식은 우리가 자라온 문화에 의해 사회적으로 학습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감정은 단지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내가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사회적 행위다.


WEIRD한 감정 이해: 서구 중심의 감정 이론 비판

메스키타가 비판하는 대상은 단순한 감정이론이 아니다. 그녀는 WEIRD(서구적, 교육받은, 산업화된, 부유한, 민주적인) 사회를 중심으로 한 감정 연구의 편향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많은 심리학 연구가 이 WEIRD 사회의 개인주의적 문화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감정을 지나치게 개인 중심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반면 비서구 사회, 특히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공동체적 문화에서는 감정이 ‘자기 표현’보다 ‘관계 유지’에 더 큰 가치를 둔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가족이나 공동체 내 조화를 깨지 않기 위해 분노나 슬픔을 억제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메스키타는 이와 같은 문화적 차이를 ‘관계 중심형 감정 모델(relational model of emotion)’로 설명하며, 감정이 관계를 조절하는 도구로서 작동함을 보여준다.


감정을 ‘공감’한다는 것의 의미

우리는 흔히 “그 사람의 감정에 공감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메스키타는 문화적 배경이 다를 때 공감이 오히려 오해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침묵을 통해 슬픔을 표현할 수 있지만, 다른 문화에서는 그것을 무례하거나 감정이 없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감정의 표현 방식이 문화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진정한 공감이란 단순히 ‘내가 그 입장이면 어떨까’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문화적 맥락 속에서 그 감정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해하려는 노력이라고 강조한다. 감정은 개인의 것이지만, 그 표현과 해석은 철저히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것이다.


우리가 감정을 다르게 배운다면, 우리는 누구일까?

메스키타의 책을 읽고 나면, 감정이란 것이 단순히 ‘느끼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이며 ‘구성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어떤 감정을 표현해도 되는지, 어떤 감정은 숨겨야 하는지를 자연스럽게 배운다. 그리고 이 감정의 문법은 우리가 속한 문화 속 관계와 규범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이 책은 단순한 이론서가 아니다. 메스키타는 자신의 연구뿐 아니라, 브라질에서 성장한 어린 시절, 네덜란드에서의 유년기, 미국에서 교수로 활동하며 느낀 문화적 충돌 경험까지 풍부하게 녹여낸다. 그녀의 이야기는 독자에게 "나는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가?", "내 감정은 누구의 것이며, 어디서 왔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한국 사회에서의 적용: 감정의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법

이 책은 한국 사회에도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은 빠르게 글로벌화되면서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로 변모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 식 감정 표현’만이 옳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왜 그렇게 무뚝뚝해?”, “감정을 숨기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같은 말은 서구식 감정 표현을 기준 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메스키타는 감정에는 하나의 보편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으며, 각 문화가 지닌 감정의 문법을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다문화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시선이 아닐까.


마치며: 감정은 우리가 만든 것

『감정, 관계, 문화』는 감정을 단순한 심리현상이 아니라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구조물로서 바라보는 새로운 렌즈를 제공한다. 감정이 ‘우리 안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이의 문제’임을 인식할 때, 우리는 비로소 타인의 감정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은 감정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뒤집으며, 타인과 더 깊이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감정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관계를 맺으며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감정이란, 결국 우리가 누구이며, 어떤 세계에서 살아가고 싶은지를 말해주는 언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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